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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의 이별>

김민서2022.01.07

<이 안의 이별>

 

 

#1 산중턱 (오전)

 

오래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풀이 자욱하게 자란 공터에는 낡은 운동기구 몇 개와 장승 하나가 서있다. 운동기구 위에 나이가 많은 남자와 이안이 앉아있다.

 

 

장승: 저번 날에는 고마워, 학생.

 

이안: 뭘요, 제가 다 한 것도 아닌데요.

 

장승: 그래도 학생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 애는 크게 다쳤을 거야.

 

이안: 아저씨도 대단하세요. 까딱하다가는 불에 탈 뻔했잖아요. (사이) 걔는 집으로 잘 돌아갔겠죠?

 

장승: 장승을 건들면 쓰나. 더 큰 벌을 받을 텐데. (사이) 그래, 집으로 잘 갔어, 가족들에게. (이안을 바라보며)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꼭 그 나이에 늘 방황을 하더군. 그 아이도 같은 거지.

 

이안: 방황이라... 저도 지금 방황을 하고있는 중일까요?

 

장승: 걱정 말게.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끝이 나기 때문에 방황인 거니까. 늦더라도 길을 찾으면 되는 거지.

 

이안: (한숨) 고맙습니다. (사이) 저 이만 내려가 볼게요. 학교가 끝날 시간이라.

 

장승: 그래, 조심해서 내려가. 저번에 같이 온 다른 학생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이안: .

 

이안, 운동기구에서 일어나 산책로를 향해 걷는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뒤를 돌아보면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장승 하나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이안은 장승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산책로를 걷는 이안을 잡는 화면.

 

이안(나레이션): 방황. 생과 사 사이에서 헤매는 것도 방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바라야 하는 것은 완전한 죽음일까, 혹은 새로운 삶일까. 알 수 없다. 알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사이) 과연 존재할까?

 

 

페이드 아웃

 

 

#2 길거리 (과거, )

 

옹기종기 모인 상가 거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듯 주황빛 조명에 둘러싸여 있다. 꽃집, 파운드 케익 가게, 술집이 모인 거리는 가지각색의 모습을 자랑하듯 한껏 자신들의 특색을 뿜어낸다.

즐겁다는 듯 거리를 둘러보며 걸어오는 이안. 교복을 입고 있다. 횡단보다 앞에 자리한 파운드 케익 가게 앞에서 자신이 들고 있는 케익 상자를 들여다보며 즐거운 웃음을 짓는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을 보고 횡단보도로 걸음을 옮긴다.

 

 

#3 이자카야 ()

 

남자 넷이 앉은 테이블에는 큼직한 탕 하나와 일본 술병 7개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 중 한 명이 차 키를 들고 일어난다.

 

남자 1 : (술에 취해 풀린 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럼 난 이만, 간다. 다음에 보자!

 

남자 2: 대리 불렀냐?

 

남자 1: 얼마 걸리지도 않아. 돈 아깝게(혀를 찬다)

 

남자 3: (낄낄 웃으며) 단속 뜨면 좆된다, 새끼야.

 

남자 1: 괜찮 (딸꾹질) , 괜찮아. 저번에도 자알~(딸꿀질) 갔습니다아.

 

남자 4: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술에 취해 깊은 한숨을 뱉는다) 뭐 잘 가겠지.

 

남자 1: 그래. (손을 들어 테이블을 향해 크게 흔들고는) 간다아!

 

남자 1은 차 키를 검지 손가락에 끼운 채 휘휘 돌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나간다.

가게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세워져 있는 세단.

몇 번이고 차 키를 끼우는데 실패를 하다가 겨우 문을 열고 시동을 걸어 차에 오른다.

 

네비게이션 안내음이 들리고 이후 빠른 비트의 신나는 팝송이 흘러 나온다

 

남자 1: (음정이 비뚤어진 콧노래를 신난 듯 부르며) 함 가보올까요오.

 

엑셀을 밟는 오른발 클로즈업.

 

 

#4 길거리 ()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안의 발.

횡단보도 중간 쯤 걸어가다 보면 건너편의 밝은 불빛들이 자신을 뽐내듯 즐비해 있다.

그곳에 시선을 주다가 다시 도로로 눈을 돌리면, 양쪽 헤드 라이트에 불을 켠 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리는 세단이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신호를 건너는 만삭의 임산부가 있다.

 

이안: ?

 

세단은 빠른 속도로 횡단보도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장면 전환: 자동차 내부) (빠르고 시끄러운 팝송)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남자 1

 

(장면 전환: 신호등)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임산부 쪽으로 달려간다.

 

이안: 위험해요!

 

임산부를 감싸듯 밀치는 이안과 그런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세단.

이안에 의해 튕겨져 나간 임산부는 불쾌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다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녀를 대신해 자리하게 된 이안은 세단을 바라본다.

 

강렬한 빛

커다란 파열음

가로등 박는 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임산부: (비명 소리을 지르며 배를 감싼다) , 양수가, 터진 것 같아요! (옆에 서있는 사람의 바짓자락을 세게 움켜쥐며) , 구급차구급차 좀 불러주세요제발

 

이안의 시야가 흐려짐과 동시에 화면도 깜빡이며 어두워진다.

 

페이드 아웃

 

 

#5 병원 수술실 앞 ()

 

수술실 앞에는 가운을 입은 의사와 이안의 어머니가 서있다.

 

의사: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만 (사이) 아직 의식이 돌아오질 않아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안 모,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다.

 

페이드 아웃

 

 

#6 고등학교 정문 ()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오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문을 빠져나온다.

이안은 정문 옆에 조용히 서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집중해서 쳐다본다. 찾는 얼굴이 없는지 한숨을 푹 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걸어가는 학생의 가방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닫아준다.

 

이안: 책 떨어질라.

 

미소 짓는 이안의 옆으로 헤드셋을 낀 짧은 머리의 여학생이 지나가며 이안을 힐끔 쳐다본다.

 

지시현: (이안이 아닌 정면을 향해) 또 왔냐?

 

이안: (기쁜 목소리로) , 나왔다! 기다렸잖아.

 

이안, 지시현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이안: 오늘 무슨 수업 들었어?

 

지시현: 물리.

 

이안: (감탄하듯) 진짜 대단해, 난 문과였잖아. 이과생만 보면 그렇게 대단해 보인다니까. ,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지시현: 땡중 의뢰. 근데 그 전에 들릴 데가 있어.

 

이안: 어디?

 

지시현: 너부터 해결하게. (멈춰 서서 이안을 본다) , 돈 안 되고 정신 사나워.

 

 

 

#7 빌라 복도()

 

지시현과 이안은 빌라 건물 계단을 걸어 올라가 3층 끝 방 앞에 선다.

현관문 옆으로 아직 열리지 않은 택배 상자와 환불 딱지가 붙은 택배 상자가 쌓여 있고, 문에는 도어락이 달려있다.

현관문 호수를 올려다 보면 호수가 적힌 표시 위에 작은 직사각형으로 우리행복교회라는 문패가 함께 붙어있다.

지시현은 벨에 붙은 아이가 자고 있으니 노크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무시한 채 벨을 세 번 연달아 누른다.

문 너머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철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로) 벨 누르지 말라니까... 나가요.

 

현관문이 열리지만 안전 장치로 막혀 절반도 열리지 않는다. 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철준이 문 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철준: ? 이게 누구야. (현관문을 닫아 안전 장치를 제거하고 문을 연다) 지시현이 아냐?

(지시현 옆의 이안에게 시선을 준다) 이상한 거 주웠네?

 

지시현: 일단 들어가서 말해. (문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철준를 비집고 방으로 들어간다)

 

 

#8 철준의 방 ()

 

방으로 들어가면 10평 남짓한 방을 반으로 나누어 한자가 빼곡히 적힌 병풍이 놓여 있다. 병풍 오른쪽은 신당이, 왼쪽으로는 평범한 자취방의 모습. 신당에는 관우상 세 개와 흔들리는 플라스틱 촛불 조명이 듬성듬성 놓여있다. 탁자는 다듬어지지 않아 나무가 삐죽 튀어나와 있고 위로 온갖 과일과 쌀이 줄지어 있다.

이안이 신기한 듯 과일을 만지려고 한다.

 

철준: (무뚝뚝한 목소리로) 위험하니까 앉아.

 

이안: (조용히 탁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철준은 이안의 맞은편에 한쪽 다리를 접어 앉는다. 지시현은 내부를 둘러보다가 이안 옆에 앉는다.

 

지시현: 교회 다녀?

 

철준: 할아버지 노하실라. 잡상인 때문에 붙인 거야. (책상에 쌀을 뿌려 손가락으로 알을 센다, 손목의 금팔찌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어디돈 들어올 데가 생겼네? 근데 오늘 일은 좀 (사이) 특이해. 쯧쯧. 어디 잘 해결해봐라. 그리고 보자, 보자. (이안을 힐끔 본다) 아이고, 쟤는 다시 보니까 반쪽이네. 요즘에도 이런 애들이 있네. 덜 죽었으면 몸에라도 잘 붙어 있을 것이지. (쯧쯧 혀를 찬다)

 

지시현: 점사 보는 꼴이 기도는 열심히 드리나 보네.

 

철준: 그래도 이게 업인데. 오늘은 왜 왔는데? 점사 하나 보러 온 건 아닐테고. 너 곧 고삼이잖아. 대학 가야지, 서울대 무당될 거라며.

 

지시현: 그러니까 그 전에 좀 해결해 두려고. (이안을 가리키며) , 오빠 말대로 반쪽이야. 몸은 혼수상태. 계속 옆에 두면 거슬리고 공부에 집중도 못 할 것 같아서. 다시 몸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이안: (놀라며) 그랬어...?

 

지시현: (이안을 무시한다) 콱 죽은 거면 모를까, 아직 이승에 붙어 있는 혼이니 멋대로 천도시킬 수도 없잖아. 오빠는 뭐 알고 있나 해서.

 

철준, 잠시 고민하는 듯 이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철준: 그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이안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며) 아가. 세상에는 혼과 영이 있어.

(설명 화면, 일러스트와 텍스트가 나온다)

지금 나 같이 몸에 들어 있는 상태라면 혼. 너처럼 밖으로 나가버리면 영.

넌 좀 특이 케이스. 영에 가까운 혼인 거지.

근데 우리 같은 무당은 영을 달래서 보내는 거지, 너 같은 혼에는 손댈 수가 없어. 부정 타거든. 그렇다고 마냥 나와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서 악귀가 되면 너는 혈육도 같이 망할 상이야.

 

이안: 그럼 다시 몸으로 들어갈 수는 있나요?

 

지시현: 내가 묻고 싶은 게 이거.

 

철준: 네가 (사이) 너 근데 이름이 뭐냐?

 

이안: 이안이요. 성이 이, 이름이 안.

 

철준: 그래. 안아. 몸으로 돌아가고는 싶어?

 

이안: ?

 

철준: 지금 몸으로 돌아가면 바로 정신을 차릴 것 같아? 절대 안 그래. 운 나쁘면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은 빠짝 섰는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으니, 지금처럼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고. 제 발로 돌아갔으니 다시 나오는 것도 못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이안: 잘 모르겠어요...

 

철준: 그래, 보아하니 지시현이 갑자기 저러는 것 같은데 너도 당황스럽겠지. (사이) 살아있는 것들은 직접 저를 볼 수가 없어. 신의 농간이지. 하지만 넌 지금 육체의 거리낌이 없는 혼이야. 눈이 향할 곳을 제대로 골라. 안인지, 밖인지. 그게 네 생과 사를 정할 테니까. 그리고 그 방황을 마치면 혼은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거다. 그리고. 남한테 미련 좀 버려. 그게 제일 성가셔. 너는 말이다, (소리 페이드 아웃)

 

이안(나레이션): 방황.

 

#1의 장승이 했던 말이 오버랩된다.

잠시 침묵하는 이안. 고민이 많은 표정이다.

 

이안: (입꼬리만 올려 웃는다) 노력해볼게요.

 

페이드 아웃

 

 

#9 주택가 ()

 

높이 쌓인 담장 뒤로 커다랗게 자리 잡은 주택이 보인다. 대문 앞에 서 있는 지시현과 이안. 주소를 확인한 지시현은 벨을 누른다.

 

인터폰: , 누구세요?

 

지시현: 지시현입니다. 연락받아서 왔습니다.

 

인터폰 소리가 끊기고 문이 열린다. 지시현과 이안이 안으로 들어간다. 마당에는 비어있는 개집과 말라붙은 밥그릇 등 강아지를 키웠던 흔적이 보인다.

 

이안: 아까 말한 그 의뢰?

 

지시현: .

 

이안: 무슨 일인데?

 

지시현: 자세한 건 봐야 알아.

 

 

#10 집 안 ()

 

고급스러운 소재의 옷을 입은 여성이 지시현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는다. 마호가니를 사용한 가구들이 들어서 있고, 찬장에는 본차이나 세트가 여러 종류 놓여 있다.

 

지시현(나래이션): (집 안을 둘러보며) 부르는 게 값이겠네.

 

지시현: 의뢰 내용은 간략히 전달받았습니다만,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미나: .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아이가 많아요. (화면, 6인용 식탁과 신발장을 비춘다) 아들만 셋인 집에서 겨우겨우 막내딸을 얻었거든요. 애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자식 자랑을 하는 미나의 모습을 보는 이안의 얼굴, 슬퍼보인다.

미나 위로 이안의 어머니가 페이드 인 되며 화면 전환.

 

이안 모: 그래, 우리 이안이가 얼마나 기특한데. 애가 미숙아였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요새는 공부를~ 공부를~ 그렇게! 잘 해요. 이번 모의고사는 국어랑 영어가 1등급이었다니까. 수학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진짜 기특해. 과외 한 번 안 받은 애가 어쩜...

 

이안 모의 화면과 목소리가 점점 페이드 아웃 된다.

이안, 미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미나: (작은 헛기침) 그런데 그 애가 요즘 이상해요. 애가 물만 보면 기겁을 하질 않나, 머리카락도 점점 빠지고... 병원에 데려가 봐도 몸에 이상은 없다고 하고. 그걸 자주 가는 절의 주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신병일 수도 있다고 하시길래 이렇게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게 됐습니다.

 

지시현: 언제부터 그런 증상을 보였나요?

 

미나: , 두 달쯤 됐을 거예요. 그 쯤에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갑자기 죽어서, 난리도 아니었죠.

 

지시현: 강아지랑 물이라. 당사자를 직접 봐야 확실한데, 따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미나: 학교 끝나고 곧 돌아올 거라, 기다려 주시겠어요?

 

지시현: . 그때까지 집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지시현, 거실에서 나와 복도와 계단, 신발장을 천천히 둘러본다. 복도에는 화염에 휩싸인 듯 보이는 추상화와 도시를 가르는 강, 가시 덩쿨이 감긴 저택의 그림이 순서대로 걸려있다. 지시현은 그 중 마지막 그림에 손을 뻗는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과잠을 입은 대학생 남자가 들어온다.

 

한일: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든다. 앞에 서 있는 지시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누구세요?

 

지시현, 고개를 꾸벅 숙인다. 뒤로 미나가 나타난다.

 

미나: 아들, 왔어? 인사해. 동생 봐주실 분.

 

한일: (한숨) 엄마, 진짜 그 얘기를 믿어? 신병이라니, 말도 안 되는 거 알잖아. (복도로 올라와 지시현 앞에 선다) 선생님. 보시면 바로 아나요? 신병이라는 거.

 

지시현: 상태에 따라 다르죠. 드는 신에 따라서 신병은 각기 다르니까요. 저만 해도 사흘 밤동안 피를 토했고. (미간을 찌푸린다) 그러니 확실하게 하려면 당사자를 봐야죠. 사실 신병보다는 악귀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고. (사이) 그편이 더 골치 아프긴 한데.

 

한일: 악귀요? (놀란 표정으로 지시현의 손을 잡는다) 애가 다치지는 않겠죠? 그거 엑소시즘? 그런 것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동생이 몸도 왜소하고 약해요. 탈은 없는 거 맞겠죠?

 

지시현: (한일에게 잡힌 손을 빼낸다) (강조하는 목소리로) 봐야, 압니다. 우선 동생 분 방 좀 보여 주세요.

 

미나: , 제가 보여드릴게요. 아무래도 여자애 방이라. (계단으로 안내한다)

 

 

 

#11 나나의 방 ()

 

화이트톤으로 정리된 방 중앙에 놓인 큰 침대와 책장이 눈에 띈다. 책장에는 수특이나 고등학생 참고서가 꽂혀 있고, 책상 위에는 작은 고양이 인형이 놓여 있다. 지시현은 인형을 손가락으로 툭 쳐서 넘어뜨린다.

 

지시현: 참고서가 많네요.

 

이안: 머리가 엄청 좋은가 봐.

 

미나: 애가 노력파라서요. (웃는다) 주인 없는 방이라, 우선은 간단하게 보시고 애가 돌아오면 다시 봐도 될까요?

 

지시현: , 조금만 둘러보겠습니다.

 

지시현, 옷장을 열어 안을 살펴본다. (화면, 옷장이 아닌 지시현을 비춤)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침대로 가 베개와 인형 사이에 끼어 있는 긴 머리카락을 들어 올린다.

 

이안: (지시현의 옆에서 함께 머리카락을 뚫어져라본다) 뭐 좀 알겠어?

 

지시현: 고양이네.

 

이안: 고양이?

 

미나: 고양이요?

 

페이드 아웃

 

 

#12 공터 ()

 

공원 구석에 작게 자리한 공터에는 화단과 벤치 두 개, 식수대가 놓여 있고, 벤치와 멀리 떨어진 곳에 밥그릇과 물그릇이 놓여 있다. 쭈그려 앉아 밥그릇에 사료를 붓고, 생수를 열어 물그릇에 물을 붓는 미나. 그 모습을 지시현과 이안이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

 

미나: 주변에 고양이가 많은 곳을 보여달라고 하시니 오기는 했는데, 원하는 곳이 맞을지 모르겠어요.

 

지시현: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시나 봐요?

 

미나: . 요즘은 이런 걸 캣맘이라고 하나요? 후후, 자식이 많아요. 제가 고양이를 좋아해서요. 첫째가 알레르기가 있어서 키우지는 못했지만.

 

지시현: 그래도, 그중에서 특히 좋아하던 아이가 있으시겠죠? 당연히.

 

미나: 맞아요. 작고 귀여운 회색털 고양이가 있었는데. 정말 친어미처럼 아꼈었죠. (사이) 요즘은 잘 안 보이네요. 영역을 옮겼나? (계속해서 손을 움직이며 그릇을 정리하고 주변을 청소한다)

 

이안: 고양이들은 그럴 때 있더라. 예전에 내가 챙기던 고양이도 갑자기 사라져서는 아이를 둘이나 낳아서 돌아왔거든. (작게) 지금은 밥 잘 챙겨먹으려나...

 

지시현: 아이를 낳으러 떠났거나, 영역을 옮겼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고양이는 죽었습니다.

 

미나, 지시현의 말에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카메라, 낮은 각도에서 미나의 얼굴 줌 인.

 

미나: (씁쓸하게 웃는다) 알고 있었어요. 어렴풋이. 그래도 어디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죽었다고 하신다면 정말 그런 거겠죠. (미나,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지시현을 본다. 씁쓸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은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시현: 그래도 잘 살고 있습니다. (사이) 따님 분 몸 안에서요.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지시현의 목소리. 미나의 얼굴은 굳어 간다. 이안마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페이드 아웃

 

 

#13 거실 ()

 

거실 테이블에는 미나, 한일, 지시현, 이안이 앉아있다. 이안을 제외한 사람들의 앞에는 작은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다. 지시현은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고, 한일은 답답하다는 듯 몸을 쭉 빼고 앉아 지시현을 바라본다. 미나, 불안한 듯 깍지 모아 손을 잡고 있다.

 

한일: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인가요?

 

미나: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한일아. 잠깐만.

 

지시현: (뺨을 두어번 긁고 한숨을 짧게 쉰다. 미나를 바라본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말이 씨가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 힘은 반복해서 말할수록, 염원이 클수록 강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혼이 있어요. 죽은 고양이를 어미처럼 돌봤다고 하셨죠?

 

미나: .

 

지시현: 무의식 중에 내 아가’, ‘엄마가같은 말을 하셨겠네요.

 

미나: ....

 

지시현: 그것 또한 말이죠. 그래서 고양이는 염원하게 되었을 거예요. 엄마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엄마 곁으로 갈 거라고. 그러다 죽었죠. 웃긴 게, 말은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갈 때 하는 게 더 강하게 이뤄지거든요. 목숨이라도 갉아서 말하는 건지, . 아무튼, 그 고양이의 염원이 이루어졌네요.

 

미나: 그렇다는 건, 우리 나나가 (사이) 나나의 몸 상태가 이상해진 것도...

 

지시현: . 남편 분 몸에 들어가면 의미가 없죠. 엄마가 되어야 되는데.

 

미나: 선생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요? 미나는 괜찮은 건가요?

 

미나, 지시현에게 손을 뻗어 그 손을 잡는다. 지시현,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보지만 뿌리치지 않는다.

그 때, 현관문 벨소리가 울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미나, 놀란 듯 한일을 쳐다보고 한일이 일어나 복도를 향해 걸어간다. 긴장된 듯 그를 바라보는 미나. 지시현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현관 쪽에서 한일과 나나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복도로 들어오는 나나.

 

나나: 엄마, 다녀왔습니다! (지시현과 이안을 보고) 근데 이 사람들 누구야?

 

머리띠를 한 나나의 머리, 가슴에 꽂힌 나나의 명찰, 흰색 캐릭터 양말을 신은 발목이 차례대로 카메라에 잡히다가, 이안의 얼굴을 클로즈업.

나나와 마주한 이안, 나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통통한 체형의 나나를 다시 풀샷으로 찍는 카메라.

 

#11의 한일의 대사 플래시백

한일: 악귀요? (놀란 표정으로 지시현의 손을 잡는다) 애가 다치지는 않겠죠? 그거 엑소시즘? 그런 것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동생이 몸도 왜소하고 약해요. 탈은 없는 거 맞겠죠?

 

이안(나래이션): 어린애가 아니었네...

 

미나, 지시현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나나 앞으로 간다. 지시현과 이안도 일어나 나나를 바라본다.

 

미나: , 나나 공부 도와주실 선생님이셔. 지시현 선생님. (지시현을 가리키며)

 

나나: 옆에는 (사이) 알았어. 나 과외 안 해도 괜찮다니까, 엄마는. 나 방에 가있을게. (웃으며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거실에 남은 미나, 간절한 눈빛으로 지시현을 바라본다.

 

지시현: 선택해 주세요. 지금은 그리 악한 상태도 아니고, 축생령은 다른 것보다 쫓기 수월해서요. 하지만 계속 저대로 두었다가는 원래 나나의 혼까지 물들 수가 있습니다. 떼어내시려면 빨리 하는 게 중요해요.

 

고민하는 표정의 미나, 한일이 옆에서 미나의 어깨를 감싼다. 미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시현: 그럼.

 

지시현, 거실을 나선다. 이안은 미나의 얼굴을 길게 바라보다가 지시현을 따라서 나나의 방으로 향한다.

 

 

#14 나나의 방문 앞 ()

 

나나의 방 문 앞에서 지시현은 교복 마이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노란색 부적을 꺼낸다.

 

이안: 그건 뭐야?

 

지시현: 축생령은 부적이랑 염불 좀 외면 가거든. 얼마 안 걸려.

 

이안: (사이) 시현아.

 

지시현, 이안을 바라본다.

 

이안: 그냥 쫓아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지시현: ?

 

이안: 나나, 아니 저 안에 있는 혼은 가족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나쁜 마음이 아니라. 그런데 그런 혼을 박정하게 내쫓는 건 너무...

 

지시현: 그럼?

 

이안: 쟤는 내가 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잠깐만 이야기해봐도 돼?

 

지시현: (한숨) 저번 장승 때처럼 하지 말래도 할 거지?

 

이안, 고개를 끄덕인다.

 

지시현: 그래, 해라. 근데 안 되면 내가 나설 거야.

 

 

# 15 나나의 방 ()

 

이안이 문을 열고 나나의 방으로 들어간다. 나나, 침대에 앉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이안: 안녕.

 

나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사이) 고양이는, 감이 좋아. 그래야 길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거든. 언니들 과외 선생님들 아니지?

 

이안: 아니야.

 

나나: 나 죽어? (사이) 이미 죽긴 했구나.

 

이안: (나나의 옆으로 가서 앉는다) 진짜 가족은 어디 있어?

 

나나: 아빠는 누군지 모르고, 엄마는 이미 죽은 것 같아. 먹을 걸 가지고 온다고 했었는데, 안 돌아오셨어.

 

이안: (나나의 손을 잡는다) 엄마랑 이별하는 거, 힘들었지. (사이) 나도 사고가 나서 지금 엄마랑 떨어져 있거든. 그런데, 진짜 나나도 그렇지 않을까? 엄마를 (사이) 보고 싶을 거야.

 

다 닫히지 못한 방문이 조금 열리고, 그 사이로 미나와 한일의 모습이 보인다. 문 밖에서 대화를 듣는 두 사람. 그들에게는 나나의 목소리만이 들린다.

 

나나: 알고 있어. 이 몸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도. 내가 엄마를 힘들게 했을까? 나 때문에 진짜 딸도 못 보고. 나는 엄마랑 같이 지내서 좋았는데, 오빠들도 잘 해주고, 아빠도 친절하고. 그런데,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든 걸까?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래서 언니들을 불러서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걸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미나, 방으로 들어온다. 나나는 놀란 표정으로 미나를 보다가 이내 미소 짓는다.

 

나나: 미안해요.

 

미나: (나나에게 다가가 안는다) 아니야. 엄마는 힘들지 않았어. 그냥 조금 걱정됐던 거야. 그리고 네가 이 모습이 아니었을 때도, 엄마는 진짜 네 엄마였는 걸. (사이)

 

나나: 엄마... (미나를 끌어안는다)

 

미나: 그런데, 네 언니가 걱정돼. 이대로 영영 못 돌아오면 엄마는 딸을 둘이나 잃어버리잖아. 네가 떠나고도 오랫동안 슬펐거든. (나나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부탁해도 될까?

 

나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지시현이 든 부적을 보며) 거기, 언니. 그렇게 무서운 거 안 들고 있어도 돼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지시현, 부적을 접어 마이 주머니 안에 다시 집어넣는다.

 

나나: (한일에게) 오빠도 고마웠어요. 형제는 처음이었는데, 다들 친절해서 행복했어. 다음 생은 가족이 많은 곳에서 태어날래. (미나의 손을 잡으며) 강아지,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진짜 수명이었으니까. (사이) 엄마가 나쁜 아이로 기억할까봐.

 

미나: 알지. 이렇게 착한 아이가 어디 있겠어.

 

나나: 진짜 갈게요. (의식을 잃은 듯, 침대로 쓰러진다)

 

미나, 나나를 끌어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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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귀갓길 (저녁)

 

핸드폰 화면을 보며 걷는 지시현, 화면에는 통장 잔고가 보이고 미나에게 입금된 금액이 적혀있다. 만족스러운 듯 웃는 지시현.

 

지시현: 괜찮은데? 냅다 쫓는 것보다 만족도도 높고. 그래서인지 수입도 좋고. (이안에게) 밥값 했다.

 

이안: 나 밥 안 먹잖아.

 

평소보다 조용한 모습의 이안.

#15의 미나와 나나의 모습이 플래시백 된다.

그 위로 이안의 어머니가 병실에서 이안의 병간호를 하는 모습 페이드 인.

 

지시현: 말이 그런 거지. 원하면 옆에 계속 있어도 돼. 앞으로도 이렇게 돈만 물어 온다면.

 

이안: 시현아.

 

우뚝 멈춰 서는 이안, 지시현은 뒤를 돌아 이안을 본다.

 

이안: , 죽어도 가족들 곁에서 죽고 싶어.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계속 누워서 살아야 할 테고, 그대로 죽는다면 나나처럼 감사 인사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족들 옆에 있고 싶어.

 

지시현: 정한 거야?

 

이안: .

 

지시현: 그래라,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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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병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둘이 걸어온다.

 

의사 1: 안녕하세요, 어머니.

 

엄마: , 안녕하세요. 저희 애가

 

의사 1과 의사 2, 엄마가 함께 이안의 병실로 들어간다.

여전히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들리는 병실에 이안은 혼자 누워있다.

이안 옆에 서서 눈을 뒤집어 작은 불빛을 비춰보고 수치를 확인하는 의사 1.

 

의사 1: 아무래도 신경이 움직인 것 같네요.

 

엄마: 깨어나는 건아직인가요?

 

의사 1: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혼수상태라고 해도 신경이 눌리거나 하면 눈이나 손 발 끝이 움직이는 일도 있거든요. 변화가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마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의사 1, 의사 2는 작게 목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간다.

 

엄마가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으면 그 옆으로 이안이 서있다.

 

엄마: 벌써 여덟 달이야꿈도 오래 꾼다, . (씁쓸한 표정으로 이안의 머리를 쓸어넘긴다)

 

 

회상 장면

사고 이후 시끄럽게 울리는 구급차와 경찰차 소리. 임산부와 이안은 각각 다른 구급차에 타 실려간다.

병원 내부를 비추는 장면. 아기 울음 소리.

 

이안: 엄마나 얼른 돌아올게.

 

이안, 등 뒤에서 엄마의 목을 끌어 안아 기댄다.

 

엄마: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만지며) 방이 좀 쌀쌀하네. 난방 좀 틀어야겠다.

 

엄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벽 난방을 조절한다.

이안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다가 병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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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가정집 (아침)

 

천장에는 모빌이 걸려있고 그 아래로 아동용 침대가 보인다. 아이는 천장에 걸린 모빌을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다. 순간, 아이의 움직임으로 인해 침대가 흔들리고 침대 옆 선반을 친다. 선반 위는 쥐, 강아지, 펭귄, 물개 등의 인형이 놓여 있다가 그 흔들림에 인해 펭귄 인형이 아이를 향해 떨어진다.

흰 손이 나타나 펭귄 인형을 살포시 받아낸다. (아이의 웃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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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파트 복도

 

펭귄 인형을 받아낸 이안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문을 통과해 복도로 걸어 나간다.

동시에 복도 끝 현관문이 열리며 지시현의 모습이 나타난다.

지시현은 걸어가다가 이안이 서있는 문 앞에 멈춰선다.

 

지시현: (이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안 질리냐?

 

이안: 좋은 게 좋은 거지. (짧게 웃고, 총총 걸음으로 지시현의 뒤를 따라간다.)

 

지시현: (무표정으로 이안을 힐끔 쳐다보다가) 갈 생각이 없구만.

 

이안: 이래 봬도 노력 중이야.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친다)

 

지시현: 어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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