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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통보업체

익명2020.02.03

헤어지자

 

 

민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여자에게 말을 건다.

신도림역 1번 출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던 여자는 민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민수는 손목시계를 보고,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다. 1150, 임 하은 씨에게 이별 통보 완료.

문자를 보낸 민수는 자신의 품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여자에게 건넨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여자는 명함을 받는다. 명함에는 이별통보대행업체라고 적혀 있다.

 

 

 

 

 

민수는 이별통보대행업체에 다니고 있다.

이별하고 싶은 이유, 이별을 통보하고 싶은 장소, 이별을 통보하고 싶은 시간대 이별을 통보하고 싶은 날짜 그리고 단돈 십만 원만 준다면,

이곳은 그 누구한테도 대신 이별을 통보해주는 회사이다.

심리학과를 나온 민수는 4년 동안 취업에 실패하다 겨우 이곳에 취직하게 됐다.

 

민수는 이런 회사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찾았다.

 

회사에 사표를 내지 못해 대신 내달라는 사람,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 달라는 사람

연인한테 대신 이별을 통보해달라는 사람, 다양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민수는 오늘도 벌써 세 명한테 이별을 대신 통보하였다. 이제 겨우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민수는 마지막 통보를 하기 위해 양천구청으로 향하는 전동차에 몸을 싣는다.

 

 

 

 

 

1, 양천구청역 앞에서 이별 통보, 이별 이유 시선에 대한 과민반응과 과한 의존에 대한 부담감.

민수는 전동차에서 고객이 보내준 정보를 읽는다.

 

12시에 가까운 시간대라 그런지 전동차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겨우 몇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유지한 채 드문드문 전동차 의자에 앉아 있다.

 

회사에서 통보대상의 사진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아직도 사진이 오지 않는다.

민수는 혀를 차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일의 피로함 때문인지 목이 아팠던 민수는 몸을 배배 꼬며 뭉쳤던 근육을 풀어준다.

목에서 두둑소리가 들려온다. 고통과 시원함이 교차한다.

 

과한 눈치라. 민수는 고객이 적어준 정보에 나온 이유를 곰곰이 생각한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다.

 

과한 부담감 때문에 이별을 부탁하는 사람은 보아도 이러한 이유로 이별 통보를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다.

 

민수는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지만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일단 지금 일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다.

 

 

 

 

무료함에 전철 창밖을 멍하니 보던 민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전 여자친구, 연아이다.

 

민수는 불쾌한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돌렸던 고개를 반대쪽으로 빠르게 돌린다.

 

다행히 연아는 민수를 보지 못한 거 같다. 민수는 쟤는 또 왜 여기에 있어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며 짓는 그의 표정은 찡그리다 못해 울기 직전이다.

 

민수는 빨리 이 전동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전동차는 민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제 곧 다음 역에 도착한다고 말한다.

 

민수는 검은색 아우터 옷깃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동차 문 앞에 선 민수는 손목을 치켜 시계를 확인한다. 125. 1시까지 이별 통보를 하면 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걸 확인한 민수는 고개를 살짝 돌린다. 연아가 눈에 들어온다.

 

단정한 느낌을 주는 밝은 청색 블라우스에 흰색 스커트를 입은 연아의 모습에서 옛날의 앳된 모습은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옛날보다 더 짙어진 화장 때문에 찾기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민수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연아를 쳐다본다.

 

 

 

 

 

민수는 연아와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둘의 나이는 같지만 민수는 연아보다 한 학년이 낮았다.

서울 근방의 사립대학을 다니던 둘은 타로 동아리 MT에서 처음 만났다.

 

민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눈만 뜬 채 멀뚱히 앉아 있었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던 민수는 막무가내로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몇 살이에요? 집은 어디세요? 밥은 어땠어? 의미 없는 대화라도 대화를 하면 어색함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어색함의 깊이는 더 깊어졌다. 나중에는 형식적인 질문조차 다 떨어져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말을 걸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민수와는 반대로 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불타올랐다.

 

 

 

 

 

10평 남짓한 방 안에서 여러 사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여자도 있었다.

연아였다. 연아의 춤은 춤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춤보다는 행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렸다.

옅은 화장에 단색 카디건과 발목까지 오는 짙은 초록색 치마가 연아의 춤을 더욱 행위예술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즐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영구처럼 바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춤을 환호했다.

 

민수도 그들처럼 즐겨보려고 했지만 금세 지쳤다. 방 안 분위기에 짓눌러 자꾸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구겨지는 표정을 펴려고 노력하지만,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웃는 사람들 속에서 민수 혼자 울상이었다. 민수는 금방 울 거 같았다. 그러다 아직 춤을 추는 연아가 눈에 들어왔다.

 

몸은 말랐지만, 아직 볼살이 빠지지 않은 여자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아까까지 웃음기가 많았던 연아의 얼굴은 살짝 풀어져 있었다.

 

그런 연아의 표정을 사람들은 보지 못했는지 더 크게 환호했다.

자연스러웠던 연아의 웃음은 어느 순간 어색한 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순간 헛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민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달려 나오면서 민수는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살짝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민수는 숨을 껄떡거리며 생각했다. 숨을 껄떡거리니 잠시 메스꺼움이 사라졌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괴성이 뿜어져 나왔다.

민수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불을 담배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누가 방에서 나왔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했다. 춤을 추고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춤을 너무 격하게 쳤는지 관자놀이에 땀이 맺혀있었다.

숨을 약하게 고르고 있던 여자는 민수에게 다가왔다.

 

손을 내밀며 담배를 빌려달라고 했다. 민수는 순간 당황했지만 자연스럽게 담배를 건넸다.

여자는 익숙한 듯 담배를 입에 문 채 치마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졌다.

 

찾고 있는 물건이 주머니에 없는지 손을 뺐다, 넣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아쉬운 듯 아저씨처럼 탄식하며 멋쩍게 웃었다.

 

담뱃불 좀 빌려줘. 높은 톤의 장난기가 많은 목소리였다.

억양은 서울 사람과 비슷했지만 사투리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었다.

 

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민수는 멋쩍게 웃는 여자한테 라이터를 건넸다. 여자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자의 담배는 금세 새빨갛게 타올랐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담배를 피웠다.

 

 

 

 

 

분위기는 어색했다. 굳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던 민수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빨리 피고 들어가야지 생각했지만 계속 여자가 신경 쓰였다.

 

아까 춤출 때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데 괜찮나? 민수는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신경은 여자에 쏠려있었다. 괜찮은지 계속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민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빠르게 담배를 피워갔다.

벌써 담배가 새끼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로까지 줄어들었다. 빠르다.

 

민수는 아직 3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필터 근처까지 담배를 피운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민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여자는 곁눈질로 민수를 쳐다봤다.

 

여자는 자신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물어보는 듯 민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민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둘 사이에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차가운 바람 소리만 들렸다. 연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뱃불을 끄고 등을 돌렸다.

민수는 등을 돌린 연아를 쳐다봤다. 붙잡으려고 하지만 연아는 빠른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민수도 무엇에 홀린 듯 시큼한 냄새가 나는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민수는 북적이는 사람들 위로 힘겹게 지나가는 연아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민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서로 얘기하기 바빴던 동아리 사람들은 일제히 민수를 쳐다봤다.

연아 또한 갑작스러운 민수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방안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모두 연아와 민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지하철은 점점 속도를 줄인다. 브레이크의 반동 때문에 민수의 몸은 메트로놈처럼 똑딱거린다.

그때 민수의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사진이 왔나 보다.

 

민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다. 형식적인 문자만 주고받는 이 실장과의 메시지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민수의 얼굴은 연아를 볼 때보다 더 일그러진다. 일그러지다 못해 아예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액정이 깨진 민수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연아의 증명사진이 떡하니 비치고 있다.

화장이 그리 진하지 않으며 귀가 다 드러난 연아의 증명사진 말이다.

 

민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뒤로 돌린다. 핸드폰만 바라보던 연아도 민수를 발견했는지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힐끗힐끗 민수를 쳐다본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민수와 눈이 마주치면 안 본 척 눈을 피한다. 눈이 마주친 둘 사이에는 어색함이 난무한다.

 

인사는 해야겠지만 어느 타이밍에 인사를 건넬지 민수와 연아 둘 다 고민을 한다.

연아는 먼저 인사를 걸까 고민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민수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무표정에는 무표정으로 대응하는 게 연아의 생각이다. 하지만 막상 무표정을 지어도 연아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을 아직 남아 있다.

    

과하게 그린 아이라인이 크게 뜬 두 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데 협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분간 말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 하는 둘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전동차 음성이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전동차의 문은 스팀 펑크의 기계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닫힌다. 전동차는 다시 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민수도 연아 쪽으로 걸어가 앞에 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민수는 간단한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내지? 연아는 말을 더듬으며 잘 지낸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몇 년 만이냐고 묻는다.

 

민수는 눈을 위로 치켜들며 공기를 들이마신다. 군대 가기 전에 본 게 마지막이니 한 10년 만이지?

 

민수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 의아해한다. 꼭 어제 본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연아는 민수의 대답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감탄한다.

 

그러고는 또다시 둘 사이에 어색함이 찾아온다.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다 민수가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남자친구 만나러. 남자친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민수는 불현듯 아까 본 카톡이 떠올랐다.

 

어색함에 푹 빠져 힘들게 웃고만 있는 연아에게 민수는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것이 난감했다.

 

손목을 치켜세워 시계를 보니 분침은 10이라는 숫자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이별 통보까지는 아직 50분이나 남는다. 민수는 연아를 바라본다. 연아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고 있다.

 

 

 

 

 

민수와 연아의 두 번째 만남은 엠티가 끝나고 나서 3주 후였다. 엠티에서 돌아오고 나서 민수는 한동안 동아리방에 가질 못했다.

동아리방에 가고 싶었지만,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남발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아리 사람들은 모두 민수를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민수와 좀 친한 형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고 민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민수가 제일 견디지 못한 것은 연아의 표정이었다.

아무 관계도 없던 연아는 그날 이후로 민수를 볼 때마다 인상을 잔뜩 구기며 벌레 보듯 쳐다봤다.

한두 번 그러면 괜찮겠지만 계속 느껴지는 시선에 민수는 점점 눈치를 보게 됐다.

 

벌써 3주째 동아리에 가질 않았다. 3주째 복지 회관 앞 벤치에 앉아만 있으니 하루가 지루했다.

그래도 타로 동아리가 타로도 보면서 좋았는데. 민수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때 민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민수는 몸을 살짝 떨며 뒤를 돌아봤다.

 

보라색 후드티에 고등학교 체육복 바지를 입은 연아가 있었다. 연아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채 벤치에 앉았다.

민수는 갑작스러운 연아의 등장에 몸이 굳어버렸다.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둘은 그렇게 몇 분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민수는 연아가 부담스러운지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먼저 말은 꺼낸 것은 연아였다.

심리학과라고 했나?

민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민수는 연아가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떨 거 같아?

연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민수를 쳐다봤다. 민수는 목덜미를 긁으며 할 말을 생각했다.

 

여러 단어가 떠올랐지만 쉽사리 떠오른 단어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민수는 자꾸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지만 입술은 계속 바짝 말라갔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연아의 얼굴은 굳어갔다. 연아의 얼굴이 굳어갈수록 민수의 입술은 더욱 바싹 말라갔다.

잘 모르겠어요. 민수는 그것을 아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연아는 민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연아는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럼 그때는 왜 나한테 괜찮다고 말했어? 민수는 난감했다.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연아 선배가 춤을 추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민수는 옹알이 하듯 연아에게 그저 힘들어 보여 그런 말을 했다고 말했다.

 

민수의 대답을 들은 연아는 자신의 머리를 긁더니 벤치에서 일어났다.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갔다. 그러다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눈치 안 봐도 되니까 동아리방에 와도 돼. 민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연아를 쳐다봤다.

그것이 연아와 민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양천구청에 도착한 민수와 연아는 서로 말없이 지하철을 빠져나온다. 밖으로 나오니 물 냄새가 민수의 코를 찌른다.

 

비가 오려나 보다. 민수는 하늘을 쳐다보고, 연아를 쳐다본다. 연아는 땅을 본 채 걸어가고 있다.

 

민수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연아 또한 민수와 생각이 비슷한지 묵묵하게 걸어간다.

 

걸어가는 동안 민수는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해 보았지만 전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민수는 연아와 헤어질 때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이별을 고하지 않고 그대로 군대에 입대해버렸다. 참 대한민국이 좁다. 이별 통보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쯤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한다.

 

연아는 민수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냐고 묻는다. 민수는 목덜미를 긁는다. 잠시 뜸을 들이다 연아에게 어느 방향인지 묻는다.

 

나는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아직 이별 통보 시간까지 40분이나 남는다.

민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남자친구가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 준다고 말한다.

 

연아는 난감하다는 듯 웃기만 한다. 민수도 난감해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든 통보 시간까지 붙어 있어야 한다.

난감한 채 연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양천구청역이 눈에 들어온다.

 

대학 시절에 참 많이 왔었는데’. 민수는 대학 시절 연아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연아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가 아마 이 역 앞일 것이다.

 

 

 

 

 

두 번째 만남 이후로 민수는 동아리방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선배들의 낯 뜨거운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연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민수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또한 연아와는 전보다 더 친해진 것 같았다.

 

장난도 치며 종종 밥도 같이 먹으며 말이다. 공강이 겹치면 같이 대학로에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연아를 보면 민수는 기분이 복잡 미묘했다. 사람들이 친해지는데 순서 없다더니 이렇게 금방 친해질 줄은 몰랐다. 참 인생 재밌는 거 같았다.

 

둘은 점점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만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둘은 어느샌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퍼져 있었다.

 

민수는 소문에 대해 부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이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별 감정 없던 민수의 마음에도, 만남이 잦아질수록 좋아하는 감정이 조금씩 싹텄다.

 

밤늦게까지 놀고 헤어질 때면 민수는 고백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만 머문 채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도 연아를 역 앞까지 데려다주고 있었다. 말없이 거리를 걷고 있지만 민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역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똥 마려운 개처럼 낑낑거렸다. 민수의 마음을 아는지 연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린 채 걸었다.

 

그러다 벌써 역 앞에 도착했다. 연아는 싱긋 웃으며 민수를 바라봤다. 고마워. 민수는 연아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연아야, 우리 사귀자.

 

 

 

 

 

네가 여기서 나한테 고백하지 않았냐?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걷고 있던 둘 사이에서 나온 첫 마디이다.

 

민수는 코를 훌쩍인다.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있던 거 같다. 그때 네가 매일 여기 데려다줬잖아. 연아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꽤 쓸쓸해 보인다. 민수 또한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둘 사이에는 어색함만 흐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민수는 손목을 치켜세워 시간을 확인한다.

 

1240.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슬슬 말을 해야 한다. 민수는 연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연아는 민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다. 순간 둘은 눈이 마주친다.

 

민수는 황급히 눈을 피하지만 부끄러운 감정은 숨기지 못한 거 같다. 빨리 아무 말이나 생각해야 한다.

 

근데 요즘 만나는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 좋은 사람이야. 화제는 돌린 거 같다. 연아는 계속해서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해 얘기한다.

 

키 크고 멋지고 자상해.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한 번쯤은 나올 법한 칭찬들이다.

 

물론 민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상하다는 말에서 살짝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괜찮다.

 

연아가 눈치를 챈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해 열성적으로 떠들어 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오빠는 솔직해서 좋아."

 

순간 민수는 가던 길을 멈춘다. 근데 너는 그때 왜 그랬어?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민수를 바라본다.

 

 

 

 

 

고백하고 난 뒤 민수는 연아와 사귀게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고백이었지만 연아가 받아주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고백 직후에는 심장이 크게 뛸 정도로 좋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은 거 같기도 했다. 나쁜 날도 있지만 분명 좋은 날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점점 연아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웠던 모습도 자기를 깎아내리면서까지 웃기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 불만을 토로해보고 싶었지만 선뜩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싸울 게 분명했다. 잔소리는 부모님이 해도 신경질이 나는 법이다.

 

그런데 남이 그런 말을 하면 신경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 그런 행동에 관해 얘기해본 적이 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 잘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서로 좋지 않은 감정만 남았다.

 

 

 

좋은 날은 점점 줄어갔고, 나쁜 날은 점점 늘어났다. 언젠간 고쳐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수는 지쳐갔다.

 

항상 둘의 대화는 이럴 거면 헤어져로 끝났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수는 연락을 하지 않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연아에게 연락이 와도 보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연아보다 친구들과 더 많이 다녔다.

헤어지자 말하면 모든 것이 편해졌다. 숨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싫은 소리가 하기 싫었다. 이대로 조용히 관계가 정리되었으면 했다. 서로 알지 못했던 시절 때처럼 말이다.

 

 

 

 

 

민수는 1학년 2학기가 끝나자마자 군대에 갔다.

 

군대 가기 전날, 연아에게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왔다. 항상 같이 다니던 양천구청역에서 만나자.

 

민수는 나갈까 고민하지만 나가지 않았다.

 

 

 

 

 

제대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했을 땐 연아는 없었다. 졸업한 모양이었다.

편하게 다닐 수 있어 좋았다. 벌써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마음은 뒤숭숭했다.

 

양천구청을 지나갈 때면 연아 생각이 들었다. 찝찝함 때문에 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이제 는 조금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수는 점차 일상에 적응해 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물 흐르듯 한 학년 한 학년을 마쳤고, 4학년에는 취업 준비에 몰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은 취업의 문턱에 여러 번 낙방한 민수는 지인의 소개로 이별통보업체라는 업체에 취직했다.

 

 

 

 

 

민수에게 처음으로 이별 통보를 의뢰한 사람은 배가 불룩 나온 40대 남자였다. 남자는 땀을 질질 흘리면서 민수에게 의뢰를 통보했다.

 

통보의 내용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 요양원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 황당했다. 돈을 주면서까지 이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돈을 준 이상 말을 해야 했다. 집으로 찾아간 민수는 고객의 아버지 방 안에 섰다.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민수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 누군가 힘겹게 말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민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4평 남짓한 방안은 조촐했다.

 

​방에는 이불과 넓적다리 책상 그리고 몸이 삐쩍 마른 60대 노인밖에 없었다. 

​노인은 몸이 쑤신지 앓는 소리를 냈다. 드러누워 있는 노인에게 민수가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김상용 씨.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민수는 자신의 옷 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명함을 받은 노인은 실눈을 뜬 채 명함을 봤다.

이별통보업체’.

 

오후 1, 김정준 씨가 당신한테 이별을 통보를 부탁했습니다. 의뢰자 김정준 씨는 김상중 씨가 다음 주 수요일까지 요양원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전달했습니다.”

 

 

 

 

 

민수는 살짝 긴장했지만 더듬지 않고 정확하게 말했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놀랐는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 민수를 잡고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민수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노인은 얼이 나간 채 민수의 말을 들었다.

 

충격이 컸는지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려 민수의 스웨터를 놓아버렸다. 민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의뢰인과 의뢰인의 부인이 서 있었다.

 

민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은 살짝 미소 지었다. 계속 고맙다며 민수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 방 안에서 노인이 뛰쳐나왔다.

 

노인은 민수와 아들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냥 네가 말해주지. 노인은 아들을 붙잡은 채 오열했다.

집 밖으로 나오면서 민수는 기분이 찝찝했다. 자신이 잘 말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수월하게 말한 점과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 신경 쓰였다.

 

마지막 모습에서 연아도 저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했다.

 

 

 

 

 

연아는 살짝 미소 지은 채 민수를 바라보고 있다. 민수는 앞니로 입술을 포갠 채 연아를 바라본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이별을 통보했지만 아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뚝뚝.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야?”

 

 

힘 빠진 목소리로 연아가 말한다. 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킨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시계를 쳐다보니 시침이 1을 가리키고 있다. 민수는 아우터 속에서 명함을 꺼내 연아에게 건넨다.

 

연아는 명함을 받아 나지막이 명함의 적힌 글자를 읽는다. 명함을 보는 동안 민수는 이별을 통보한다.

 

 

박연아 씨, 새벽 한 시, 정지원 씨가 이별 통보를.... 부탁했습니다.”

 

 

명함을 봤지만 연아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그저 묵묵히 민수의 말을 듣고 있다. 거세지는 비 때문에 머리가 푹 내려앉아 있다.

 

민수 또한 비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꼭 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빨리 도망치고 싶다.

 

괜찮았던 찝찝함은 처음보다 더 심해진 거 같다. 민수는 꾸역꾸역 멘트를 말한다. 연아의 얼굴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비인지 눈물인지 눈에는 물이 고여 있다. 꾸역꾸역 말을 하던 민수는 이제 거의 다 말하였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헤어지자. 이 한마디만 말하면 다 끝이다. 하지만 입을 본드로 붙였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연아는 웃고 있다.

 

웃는 연아의 얼굴을 보니 복잡한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입은 저절로 벌려졌다.

 

 

헤어지자

 

사람들은 진심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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