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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란 의상, 남성이란 의상 – 소녀 만화론

관리자2018.12.12

 

만화 캐릭터의 성별은?

 

만화 “보석의 나라”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당시, 원작자 이치가와 하루코가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강조한 것은 주인공들이 “무성(無性,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치가와에 따르면 보석을 의인화한 주인공들은 소년의 상반신에 소녀의 하반신을 지니며 어떠한 성(sex)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더라도 캐릭터의 신체를 함부로 변형시켜 가급적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보석의 나라”의 독자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 독자들이 작품 속 캐릭터의 모호한 성별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어 anan이나 PASH!의 특집 기사를 살펴보면 “보석의 나라”의 성 구분법에 유독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치가와가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캐릭터의 성에 관해 주의를 준 것도 이와 같은 독자들의 취향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토록 무성(無性)의 신체에 끌릴까?

     

그렇다면 왜 이들 여성 독자는 그토록 “무성(無性)”의 신체에 끌렸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소녀 만화 장르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소녀 만화 장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1928-1989)의 “리본의 기사”(우리나라에서는 “사파이어 왕자”로 번역되었다)라는 작품에 조우하게 된다. 1953년부터 연재된 “리본의 기사”는 소녀 만화 장르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오늘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만화 “리본의 기사”는 여자로 태어난 사파이어가 우여곡절 끝에 왕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품은 왕위를 이을 왕자의 탄생을 온 국민이 기다리는 가운데 왕녀 사파이어가 태어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기의 탄생을 처음 알리는 신하가 심한 사투리를 쓰는 관계로 태어난 아기가 “오조”(왕녀를 뜻하는 일본어 발음)인지 “오지”(왕자를 뜻하는 일본어 발음)인지 분명히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자를 학수고대하던 사람들은 멋대로 아기가 “오지”(왕자)라고 떠들기 시작했고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왕실은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그래서 사파이어는 오랜 기간 여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왕자로 키워지게 된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는 남녀의 성이 남들의 언어, 그것도 발음 하나 차이 (“오조”의 “조”와 “오지”의 “지”)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성은 개인의 의지나 성격과는 상관없이 남들의 사정에 의해 멋대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별이란 하나의 패션에 불과할지도.

 

이렇게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보통 남성이나 여성과 같은 성별은 인간의 본질과 연관된 절대적인 것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성별이란 하나의 패션에 불과하다는 게 “리본의 기사”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다. 작품 속에서 사파이어는 남장과 여장을 거듭하며 상황에 따라 남성과 여성을 자유로이 연기한다. 단지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사파이어는 연병장에서 병사들을 호령하기도 하고 또 무도회에서는 잘생긴 왕자와 다정하게 춤을 추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리본의 기사”에서는 똑같은 얼굴을 지닌 캐릭터가 입은 옷에 따라 얼마든지 멋진 남성 혹은 예쁜 여성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입었다 벗을 수 있는 의상과 같다고 “리본의 기사”는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리본의 기사”의 상상력에 여성 독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소녀 만화 장르의 원리로 삼았다. 소녀 만화 장르란 기본적으로 소녀들이 즐겨보는 만화이다. 즉, SF 만화, 에로 만화, 개그 만화처럼 소재에 따라 장르를 정의하는 것과 달리 소녀 만화 장르가 형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녀 독자층이다. 1950년대 당시 소녀들이 여가 시간에 접할 수 있는 매체는 현모양처가 되고자 하는 소녀들의 인생 역정이 담긴 소설들뿐이었다. 그 소설들에서는 여성성을 정의하고 소녀 독자들이 그 언어들을 내면화하도록 기능했다. 그러한 때 등장한 “리본의 기사”는 여성성이란 한 꺼풀 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화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여성이라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쾌감을 소녀 독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이에 소녀들은 더욱 넓은 해방감을 추구하게 되었고 거기에 호응하는 형태로 만화가들이 소녀 만화 장르를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신체가 소녀 만화 장르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신체는 여성과 남성의 옷 모두에 어울리며 또 궁극적으로는 그런 옷과 관계없이 존립한다. 즉, 남들이 입히는 의상 없이도 신체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이는 소녀 만화 장르를 즐기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로 그들은 “리본의 기사”에서 “보석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캐릭터들이 몸소 이를 증명하는 과정에 변함없이 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석, 일본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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