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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봐요 동물의 숲>, 쉬운 게임을 보는 것

진예은2020.12.20

 


 

 

 

<모여봐요 동물의 숲>, 쉬운 게임을 보는 것

 

 

 

 

들어가며 

명실공히 게임 강국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년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만 10세~65세의 인구의 70.5%가 게임을 플레이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특히 10대와 20대의 이용률은 각각 91.5%, 85.1%라고 한다. 사실상 10, 20대들은 열 명 중 적어도 여덟 명은 게임 경험을 가진 셈이다. 이와 함께 e스포츠에 대한 열기도 뜨겁다. 매년 성공적으로 e스포츠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는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오브레전드>나 블리자드의 <오버워치>와 더불어, 이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위상은 이미 세계적인 레벨에 이른다. 

 

 

 

응답자 특성별 전체 게임 이용률

(출처 : 2020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

 

 

 

<스타크래프트> 시절부터 현재의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까지, 나아가 오락실에서 ‘동네 고수’의 게임 플레이를 구경하던 시절까지 이야기하자면, 사실상 게임을 보는 문화는 늘 한국 게이머의 곁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핵심은 게임을 잘 하는 것, 즉 슈퍼 플레이와, 이 슈퍼 플레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 아프리카TV에서 유튜브로 이어지는 인터넷 문화의 흐름은 이 ‘보는 게임’ 문화에 이변을 가지고 온다. 경쟁, 전쟁, 격투 게임이 아닌, 만들고, 표현하고, 꾸미는 게임을 보는 즐거움이 대두된 것이다. 

 

 

 

2017 롤드컵 결승전의 열기 / 주석 : ‘슈퍼 플레이보기. 당시 롤드컵 결승전에 오른 팀은 모두 한국 팀이었다
(출처: SBS 스페셜 페이커이상혁에 열광하는 중국... 한국 e스포츠가 만든 한류’(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725181))

 

 

 

  바야흐로 표현의 시대를 맞아 SNS 등에서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는 2020년, 게임 문화에서도 개성의 표현과 공유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보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흔히 게임이라 함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혹은 TV나 오락기 앞에 앉아서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게임을 보는 문화는 게임을 하는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게이머의 곁을 지켜왔다. 이와 관련하여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은 그의 저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플레이어의 입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그에 대한 컴퓨터의 응답은 대부분 시각 이미지에 의존한다. 이 피드백은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앞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볼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구경꾼은 플레이어가 주어진 과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제3자의 시각에서 지켜볼 수 있다.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게임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구경꾼에게는 ‘게임 보는 재미’가 존재한다.” 

 

게임 보는 재미. 즉 내가 아닌 누군가가 게임을 할 때 이것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으며, 이것이 곧 ‘보는 게임’이 되겠다. 오락실에서 앞사람 게임하던 것을 구경하던 이 문화는 곧 ‘롤드컵’, ‘옵드컵’ 등, 세계적인 규모의 e스포츠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3 오락실의 풍경

(출처 http://gametoc.han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8626 )




이후, 아프리카 TV와 유튜브, 트위치 등의 인터넷 방송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프로게이머가 아닌 게이머들도 자신의 개성적인 게임 플레이를 송출하기에 이른다. 승리를 쟁취하는 게 목적인 e스포츠와 달리, 인터넷 방송 플랫폼은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똑같이 <오버워치>를 플레이하더라도 저격수 캐릭터로 적 팀의 절반을 사살하는 슈퍼 플레이를 보여주는 크리에이터가 있는가 하면, 한 캐릭터만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사살하는(괴롭히는) 개성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의 등장으로, 오직 ‘어떻게 승리를 추구하는가’만 보여주던 ‘보는 게임’에 스토리텔링이 결합한 콘텐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https://youtu.be/3N83qalBABU

오버워치 X Overwatch Montage [오버워치] 위도우메이커의 “Fl0w3R” 괴물이 모두 패배를 시키다 | 오버워치 월드컵 매드무비

(프로게이머 ‘Fl0w3R’의 슈퍼 플레이)

  


 https://youtu.be/73sIjFXv5gw

김재원의 즐거운 세상 : 메이코패스 때문에 개빡친 풍원이(토르비욘)

(프로게이머의 슈퍼 플레이와는 달리, 보는 사람이 웃을 수 있는창의적 컨텐츠를 제공함.)

 

 


게임 같지 않은 게임-닌텐도의 이념과 <동물의 숲>  

세상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경쟁하고, 싸우고, 이기고 지는 게임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컨트롤이나 게임 전략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들 게임에 흥미를 가지기 쉽지 않고, 흥미를 가지더라도 쉽게 낙담하기 일쑤이다. 지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게임에서 늘 이길 만큼 게임을 잘 하려면 그만큼의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하는 게임을 즐겁게 보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리그오브레전드>의 규칙과 특성에 대해 무지하다면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본다고 한들 재미를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상혁 선수의 명성을 알고 그의 경기로 <리그오브레전드>를 접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그의 플레이를 이해하고 재미를 느끼는 게 가능하냐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e스포츠는 ‘보는 게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현하였지만, 결국 마니악 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닌텐도는 ‘잘 해야 하는 게임’에 대해 무지한, 혹은 이런 게임들을 잘 못하는 비 게이머와 ‘똥손’ 게이머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을 타깃층으로 삼는 전략을 선택했다. 닌텐도는 게임적 재능이나 게임에 대한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 비 게이머가 구입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게임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닌텐독스>, <두뇌 트레이닝> 등, 게임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을 제작했고 크게 성공했다. <동물의 숲> 시리즈도 마찬가지이다. 경쟁 게임과 달리 특별한 컨트롤이나 전략을 요구하지 않으며 뚜렷한 목표(경쟁 게임의 경우 승리)가 없으므로 플레이어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매력, 개성과 정체성의 표현

이번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기존 <동물의 숲> 시리즈와 비교했을 때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의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집 위치, 주민의 집 위치, 게임 내 주요 건물(상점, 박물관 등)의 위치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으며, 나아가 주어진 섬의 지형까지 변경이 가능하다. 또한 집안뿐 아니라 실외에도 가구 배치가 가능하다는 점을 통해 섬 전체(마을 전체)를 마음껏 디자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와 더불어 취향대로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요소의 개수 또한 늘어남에 따라,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기존 시리즈에 비해 게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즉 자유도의 가짓수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나무를 흔들어 과일을 주워 먹고 채집을 통해 얻은 생물을 박물관에 넘기는 데 그치던 게임에서, 인테리어, 패션 아이템, 시스템 면에서 다양한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모동숲 인게임


 

플레이어들은 이제 자신의 섬을 자유롭게 꾸밀 수 있게 되었다. 집 내부부터 섬 전체에 이르기까지, 풀숲에 불과하던 섬에 타일과 도로를 깔고 주민과 플레이어의 집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배열하기도 한다. 다분히 현실의 도시와도 같은 마을의 모습을 보고 혹자는 ‘동물의 숲이 아니라 인간의 숲 같다’고 말한다. 

한편, 다양한 콘셉트와 설정으로 마을을 디자인한 플레이어들은 섬의 사진을 촬영하여 자신 있게 SNS에 업로드한다. 자신의 마을에 타 플레이어들을 초대하여 일종의 역할놀이를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나아가 이를 통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저항 운동을 하기도 한다. 

 

 

 

 

 모여봐요 인간의 숲 

(출처 : https://giphy.com/gifs/XgFfeLI9CjYiernHG8?utm_source=iframe&utm_medium=embed&utm_campaign=Embeds&utm_term=https%3A%2F%2Fwww.insight.co.kr%2F )


 

모동숲 프리 홍콩


 

이처럼 <모여봐요 동물의 숲> 플레이의 본질은 원하는 모습으로 각자에게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리고 그 마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즉 표현과 공유이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마을은 획일적이지 않다. 다양한 아이템과 시스템을 바탕으로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마을과 섬, 캐릭터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는 특별한 컨트롤이나 게임적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다. 허덕이며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내가 시간 날 때, 내가 원하는 만큼 섬을 꾸미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게임표현의 결합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통해 표현한 정체성(게임 경험)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공유되고, 함께 향유된다. 이른바 ‘나비보벳따우’ 열풍으로 시작된 유튜브 공간 내 <동물의 숲>의 유행은 곧 <모여봐요 동물의 숲>으로도 이어졌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해봤든, 해보지 않았든, 시청자는 크리에이터의 게임 플레이를 구경함으로써 꾸미기 전의 섬의 원형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이후 해당 크리에이터의 방송에 등장하는 다양한 <모여봐요 동물의 숲> 플레이어의 섬은 명백히 크리에이터의 텅 빈 섬과 다르다. 또한 각각의 플레이어의 개성이 녹아있으므로, 시청자들은 방송이 켜질 때마다 새로운 섬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꾸미는 게 가능하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가 <모여봐요 동물의 숲> 스트리밍 콘텐츠의 핵심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스템은 자신의 섬을 제공하는 플레이어에게도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크리에이터 한 명만 초대하는 것으로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나의 ‘표현’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youtu.be/qdaxxSpkHvo 

꽈뚜룹 동물의 숲 고인물, 조선시대 컨셉 ㅋㅋㅋㅋㅋ

 

 

 

이경혁은 게임 문화가 “멀티채널 시대를 맞이하면서 입담 좋고 기획력 있는 개인 BJ들이 자신의 창의력으로 가장 손쉽게 재미를 뽑아낼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 시장에서 게임을 일종의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여러 크리에이터들이 <모여봐요 동물의 숲>를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나아가 이를 통해 ‘보는 게임’ 제작자의 저변이 넓어졌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한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방송 콘텐츠 화는 애초에 ‘시참’, 즉 시청자의 참여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e스포츠 문화나 실력 있는 몇몇 프로게이머들의 무대였다면, 현재 트위치, 유튜브, 아프리카TV에서 ‘보는 게임’의 제작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나가며

대한민국 사람들은 때로 괴롭게 게임을 한다. ‘부모님 걸고 게임한다’는 말이 이미 한국의 젊은 층 사이에서는 통용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게임을 잘 하지 못하면, 같은 팀에게 거친 ‘패드립’을 듣는 것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닌텐도 사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 열풍을 통해 우리는 비 게이머, 똥손 게이머일지라도 게임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콘텐츠 화는 사이버 공간에서 얼굴도 모르는 타인과 어떻게 게임 경험을 공유하며 즐거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게임 잘 못하는 사람이라도 즐거울 수 있는 게임, 쉽게 접할 수 있고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여전히 마니아틱 하게 느껴지는 콘솔 게임이 점차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참고할 만한 방향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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