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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숲인가, 노동의 숲인가?

허지민2020.12.20

 



 

 

 

<힐링의 숲인가, 노동의 숲인가?>

 

허지민

 

 

 

들어가며

  큰 인기를 끌어왔던 <동물의 숲>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힐링 게임’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에 있어서는 <동물의 숲>의 가장 큰 특징인 ‘높은 자유도’를 가진 게임성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게임은 전투 요소도, 특정한 목적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플레이어만의 섬을 꾸미고 살아가는 게임이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을 넓혀가고 인테리어를 하는 등의 다양한 콘텐츠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성격과 모습을 지닌 귀여운 동물 친구들과 안부 인사를 묻고 선물을 주고받는 등 교류하고 어울리면서 섬을 꾸며나가는 이 게임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층이 즐길 수 있는 힐링 게임으로 불린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자극적이지 않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이 게임은 말 그대로 ‘슬로 라이프’를 느끼게 해주는 게임이다. 또한 온라인 접속을 통하여 다른 플레이어를 자신의 섬으로 초대하거나 자신이 직접 다른 플레이어의 섬으로 놀러 가서 여러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코로나의 영향 없이 게임 속에서라도 만나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동물의 숲>이 요즘 같은 시기에 힐링 게임으로 불리며 더욱 인기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힐링의 숲>이 아닌 <노동의 숲>

  그러나 <동물의 숲>이 가진 ‘힐링 게임’이라는 수식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게임을 힐링이 되는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플레이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동물의 숲>이 힐링과는 거리가 먼 노동과 자본주의의 게임이라고 말하며 <채무의 숲>, <노동의 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사람에 따라 생각하고 있는 힐링이나 노동의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 본인의 경우에는 막노동과 같이 반복적으로 진행하여 힘이 드는 일을 노동으로 생각하며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하는 것을 힐링이라고 여긴다. 

 

  <동물의 숲>에는 이주 비용과 함께 집을 넓혀가기 위해서 상점 주인을 맡고 있는 너구리 캐릭터에게 빚을 지고 돈을 벌어 갚아야 한다는 설정이 있다. 빚을 갚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열매를 줍고 낚시를 하거나 곤충 채집을 하여 그것들을 상점에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 게임 속에서마저도 빚을 지고 그것을 갚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점은 묘하게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저 처음에는 ‘놀이’라는 요소로 즐기게 된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변제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한 필수적인 ‘경제 활동’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는 ‘주민 이주 프로젝트’라는 다른 동물 주민들의 이주를 위해 다리를 놓고 집터를 찾아 주고 그 집에 들어갈 가구를 제작해서 넣어주는 일 모두 플레이어 혼자 진행해야 한다. 또한 섬을 예쁘게 가꾸기 위해서 초반에 잡초를 제거하고 철광석과 같은 자원을 채취하는 등의 일도 플레이어가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이 모든 노동에는 아무런 대가도 따르지 않는다. 때문에 섬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을 해야 하며 플레이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결국 힐링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집을 굳이 넓히지 않아도 되며 빚에 대한 별다른 독촉도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천천히 빚을 갚아도 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플레이를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낚시나 채집 등의 행위를 반복하여 계속 재산만을 불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빚을 갚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 또한 힐링이라고 볼 수 있을까?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게 콘텐츠를 진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달성하듯이 계속 빚을 갚기 위해 반복적으로 돈을 벌고 프로젝트를 빨리 성사시키고자 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퀘스트를 달성해야 하는 류의 게임들을 계속 플레이하기 때문에 이때 생겨난 습관들이 <동물의 숲>에서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콘텐츠를 여유롭게 즐기기보다는 계속 경쟁의식을 가지고 빨리 집을 짓고 빚을 갚다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난 후에는 흥미를 잃고 게임을 떠나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동물의 숲>이 가진 힐링 게임이라는 수식어에 의문을 제기 받는다고 생각한다. 

 

 

<동물의 숲>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위에서 말했듯이, 막상 게임을 해보면 집을 굳이 넓히지 않아도 되고 빚에 대한 독촉도 따로 없기에 빚을 느리게 갚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돈을 벌고 집을 넓혀나가고 싶어 한다.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은,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에 게임 속에서라도 집을 넓혀가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채워지기 어려운 사람들의 욕망이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채집이나 낚시 등을 통해 얻은 것을 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계속 돈을 벌려고 하며 집을 더욱 넓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게임 내에서도 자본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게임 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의 편의를 위해서 유저들 간의 거래를 하거나 재화를 사용하여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주는 게임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예시로는 RPG 게임인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등이 있다. 이러한 게임 속 플레이어는 재화를 사용하고 다른 유저와의 거래를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필요한 아이템을 바로 구하고 운이 따라야 하거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막노동을 해야 하는 과정을 빠르게 해결하려는 등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동물의 숲>은 이러한 게임들과는 다른 장르의 게임이지만 비슷하게 분류된다. <동물의 숲> 또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상당히 활성화되어있는데, 커뮤니티를 통해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며 자유롭게 거래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게임 내 존재하는 아이템을 불법으로 복제하여 다른 플레이어에게 팔아넘겨서 이득을 채우는 플레이어들도 존재한다. 또한 플레이어가 원하는 주민을 마을에 초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아미보 카드’라는 것이 있다. 이 아미보 카드는 원래 장당 3천 원 정도면 구매가 가능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주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인기 아미보의 경우 몇 배는 비싸게 팔리는 모습들도 볼 수 있다. 리니지나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 시스템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이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원하는 카드를 얻고자 하기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 밖에서 금전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느낄 수 있다. 

 

 

플레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동물의 숲>

  사실 빚을 지고도 이자도 없이 아무 때나 벌어서 갚을 수 있으며 빚에 대한 독촉조차 안 하기에 편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빚을 갚는다는 점이 현실적일지라도 돈을 벌어 본인의 집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은 요즘같은 취업난에 무언가를 얻고자 하더라도 계속 현실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혀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힐링이라고 다가온다. 현실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고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도 노동 자체를 따분해하고 힘들어하여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를 통해 잘 만들어진 자신만의 섬과 집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듯 <동물의 숲>은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 없이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성향과 생각에 따라 차이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동물의 숲>을 ‘힐링 게임’이라고 보는 것에 대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힐링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보는 관점 또한 나타난다. 서로가 생각하고 느끼는 힐링의 의미는 주관적으로 다르기에 같은 게임, 같은 부분을 보고 플레이하더라도 누군가에겐 ‘힐링의 숲’, 또 다른 누군가에겐 ‘노동의 숲’, ‘채무의 숲’ 등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게임이 바로 높은 자유도를 가진 <동물의 숲>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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